보험사 의료자문제도 도마위

▲ 롯데손해보험 사옥 (사진제공=롯데손해보험)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면서 의학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 의료기관으로부터 자문 받을 수 있는 제도인 ‘의료자문제도’. 과잉진료와 보험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의료자문제도가 보험금 지급을 회피하려는 보험사의 도구로 악용되고 있어 논란이다.

감독당국인 금융감독원은 의료자문제도의 공정성 회복을 위해 개선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보험 업계와 의료계 반발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양새다. 제도 개선이 늦어지면서 의료자문제도는 계속해서 보험사와 보험계약자간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다.

#. 40대 남성 A씨는 2018년 9월 경북 경주시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식이 혼미할 정도로 뇌출혈 등의 중상을 당한 A씨는 4개월 동안 입원과 수술, 재활 치료 등을 받았다. 약 10년 전 롯데손해보험의 보험에 가입했던 A씨는 후유장해 장해율 56%로 장해보험금을 보험사에 청구했다.

그런데 롯데손보는 자사 자문의가 장해율을 16%로 판단했다며 장해보험금을 깎아서 지급했다. 이후 A씨는 3차 병원을 통해 장해율 40%로 보험금을 재청구했으나, 보험사는 뚜렷한 근거 없이 A씨가 선임한 손해사정사의 손해사정서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환자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자문의의 회신문을 근거로 장해율은 16%라며 보험금 지급을 재차 거부했다.


금융소비자연맹 “보험사, 자문제도 횡포로 보험금 지급 거부”
의사 한명이 수백건 자문…보험사-의료계 카르텔 합리적 의심


보험금 거부 수단된 의료자문제도
11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금융소비자연맹(이하 금소연)은 지난 2일 롯데손보 등 손해보험사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진단한 주치의의 ‘진단서’를 부인하고, 환자를 보지도 않은 유령 의사의 불법적 자문소견으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다며 소비자주의보를 발령했다.

보험사 의료자문제도는 장해진단 등의 의료사건이 발생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상황에서 보험사와 보험계약자 간 이견이 발생한 경우, 해당 사안이 보험금 지급사유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3의 의료기관에 소속된 의사로부터 자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의학 전문가의 판단으로 과잉진료나 보험사기를 걸러내자는 게 제도의 취지지만, 실제로는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구실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금소연은 롯데손보의 사례가 전형적인 보험금 부지급 횡포라고 비판했다. 롯데손보는 자문의를 내세워 A씨가 선임한 손해사정사의 손해사정서 뿐만 아니라 직접 치료한 의사의 진단서 자체를 부인했다.

이 자문의가 환자를 직접 보지도 않고 의무기록과 검사기록, 환자동영상 검토만으로 장해율을 책정한 것도 문제다. A씨가 선임한 손해사정사는 A씨의 장해율을 이동 10%, 음식물섭취 10%, 대소변 10%, 환복 5%, 목욕 5% 등으로 진단했지만, 롯데손보 자문의는 이동 10%, 목욕 3%, 환복 3%로 낮춰 진단했다.

배홍 금소연 보험국장은 “금감원은 보험사들이 보험금을 깎고 줄이기 위해 손해사정사의 손해사정서를 합당한 이유 없이 거부하지 못하게 하고, 자문의사제도를 악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발표해 국민들 안심시키고 있지만, 정작 보험사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손해사정서 부인과 자문의 횡포’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사진제공=게티이미지뱅크)

끊이지 않는 공정성 논란
보험사의 의료자문제도가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제도의 취지와 달리 보험사가 보험금 감액 또는 부지급의 근거로 활용하거나 자문제도의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계속돼 왔다.

지난해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된 바 있다. 당시 정무위원회 소속이었던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환자를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익명의 자문의가 환자 상태를 가늠하고 보험금을 축소지급할 근거를 만들어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치의가 진단한 내용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려면 적어도 주치의보다 환자를 세밀하게 봐야 하는데, 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질병코드를 바꾸는 의료기관 자문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의료자문제도가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증거는 또 있다. 전 의원은 “보험사들이 의료자문을 의뢰한 병원은 특정 10곳에 몰려있다”며 “의료자문을 할 수 있는 병원 자체가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한 명의 의사에게 수백건에서 1000건까지 의뢰한 사실은 보험사와 의료계의 카르텔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태규 국민의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생명보험사의 의료자문 의뢰 건수 1위는 인제대 상계백병원으로 총 1만2105건이었다. 고려대안암병원(1만839건), 서울의료원(9162건)이 그 뒤를 이었다. 같은 기간 손보사의 경우 한양대병원(1만9972건), 이대목동병원(1만8952건), 인제대 상계백병원(1만7816건)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의사 B씨는 2018년 한 해에만 보험사로부터 총 1815건의 의료자문을 요청받아 약 3억5093만원의 의료자문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 계산으로 B씨는 하루 평균 6~7건의 의료자문을 진행했다는 말이 된다. 1815건 중 65.6%가 삼성화재로부터 요청받은 의료자문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 다른 의사 C씨도 특정 보험사로부터 566건의 의료자문을 하고 1억1355만원의 수수료를 받았다. 보험사와 의사 간 카르텔이 형성돼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의료자문 늘수록 부지급건↑
의료자문은 얼마나 빈번히 이뤄지고 있을까? 금감원에 따르면, 2018년 국내 보험사의 의료자문 의뢰건수는 8만7467건으로, 2014년 3만2868건 대비 2.6배 증가했다. 늘어나는 의료자문건수만큼 보험금 일부 또는 전부를 주지 않는 부지급 건수도 늘고 있다. 손보사의 경우 2018년 의료자문 의뢰 건수 6만7373건 중 1만8871건(28%)이 부지급건으로 결정됐다. 같은 기간 생보사의 의료자문 의뢰 건수는 총 2만94건이었는데, 부지급건은 1만2510건으로 절반이 넘었다.

 

▲ 생보사 의료자문 결과 현황 (자료제공=이태규 의원실)

 

▲ 손보사 의료자문결과 현황 (자료제공=이태규 의원실)

 


의료자문 건당 20~50만원의 비용이 지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험사들은 일년에 수백억원의 자문료를 들여 고객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험금 지급을 아끼고 있는 셈이다. 보험소비자들의 불신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상황이 이렇자 감독당국인 금융감독원도 의료자문제도의 개선방안을 여럿 내놓았다. 전문의학회로 구성된 제3의료자문기관을 설립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으로 제시됐다. 실제로 금감원은 2017년 보험협회 등과 태스크포스를 꾸리고 ‘금감원을 통한 제3의료기관 자문절차’를 마련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취재결과 현재 제3의료자문기관은 운영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손보업계에서는 협회에 의료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의료자문위원회를 설치해 한동안 운영했지만, 이마저도 지난해 11월부로 폐지됐다. 최근 보험업감독규정 개정을 통해 의료자문 관련 설명의무 조항이 신설되면서 오히려 자문기구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 손보업계 관계자는 “보험업감독규정이 개정되면서 의료자문과 관련해 설명의무가 강화됐는데, 자문기구가 보험금 관련 민원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운영하기가 오히려 부담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의료자문제도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개정이 오히려 제도 개선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제도개선 약속한 금감원…업계 반발에 갈 길 잃어
공시 확대로 투명성 확보…“신뢰 회복이 선행돼야”

갈 길 잃은 감독당국
금감원은 이미 3년 전 ‘보험회사의 의료분쟁 관련 불합리한 관행 개선’이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의료자문제도를 대대적으로 손보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의료분쟁의 자율조정 절차 개선, 보험사의 의료자문 현황 공시, 자문절차 신설, 의료분쟁전문소위원회 설치와 운영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현재까지 의료자문 절차의 설명의무 강화와 보험사별 의료자문 현황 공시 정도만 도입됐다. 의료자문제도와 관련 정보제공이 확대됐을 뿐, 정작 의료자문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문절차 신설과 심사강화는 요원한 상태다.

보험업계에서는 의료자문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의사들이 민원에 대한 부담을 느껴 의료자문을 거부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 뜻을 내비쳤고, 이 과정에서 논의가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

의료자문 프로세스는 아예 ‘중장기 과제’로 밀려났다. 금감원이 의학회들과 접촉했지만, 비용과 인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협약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논의됐던 보험업법 일부개정 법률안도 회기가 만료되면서 자동폐기됐다. 전재수 의원은 지난해 ‘의료자문의 실명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보험사가 보험금 책정 등을 위해 자문의로부터 의료자문을 받은 경우 보험계약자에게 자문의 성명과 소속기관 정보, 의료 자문결과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행 제도가 자문의의 익명성을 보장하면서 ‘깜깜이’로 운영되고 있는 부분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에서다.

이태규 의원도 보험사가 의료자문을 통해 보험금을 감액하거나 지급하지 않는 경우 해당 의료자문 기관이 보험계약자를 직접 면담해 심사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이 또한 폐기됐다. 21대 국회도 이제 막 열린 상황이라 관련 법안이 언제 다시 논의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금소연 측은 제도 개선에 큰 기대가 없는 눈치였다. 배홍 금소연 보험국장은 “하다못해 손해사정사 제도도 시행 중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라면서 “보험사는 이런 제도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고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끔 해야 하는데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도 중요하지만 현행 제도가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배 보험국장은 “보험사의 잘못된 관행에 대해 지적하는 건 보험사들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면서 “소비자 권익이 신장되고 보험사들이 신뢰를 얻어 소비자의 선택을 다시 받는 것이 서로 윈윈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은 신뢰…갈 길 먼 의료자문제도
보험사들은 보험업감독업무 시행세칙이 개정됨에 따라 ‘의료자문 부지급률’ 공시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에는 의료자문 의뢰건수와 의료기관 명만 공시했지만, 이제는 의료자문 실시율과 부지급 건수, 일부 지급 건수 등도 함께 공시하게 된다. 금융당국과 보험업계는 의료자문 현황이 보다 투명하게 공개되면서 소비자 신뢰 제고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공시가 확대된다고 해서 의료자문제도의 투명성이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보험사와 의료계의 담합 여부는 데이터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배홍 금소연 보험국장은 “보험사들의 공시를 보면 합리적으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며 “이번 공시 확대도 그 연장선에서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저작권자 © 팩트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